이번 글에서는 생태 환경으로서의 텔레비전 기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생태 환경으로서의 텔레비전
만약 이렇게 확대된 의미의 문화 개념을 채택할 경우, 텔레비전이라는 문화적 장치가 지닌 위상과 비중은 엄청나게 커진다. 많은 이들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과 함께 보내고, 텔레비전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며, 동시에 자신이 동일시할 수 있는 '우리의 문화'를 발견한다. 고급한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거나 취향이 계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텔레비전 시청은 통속화된 미적 활동이자 대중화된 예술 감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엘리트들이 유난히 텔레비전을 평가 절하하고 멸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지닌 의미화 실천으로서의 문화적 기능 때문에 엘리트들은 텔레비전을 거부할 수 없다. 텔레비전보다 대중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고 일상적으로 효력을 미치는 매체는 없다. 오히려 대중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나 자본, 사회적 기득권, 엘리트들이 끊임없이 텔레비전을 통제하고 검열하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활용코자 개입한다. 텔레비전의 의미화 실천을 지배함으로써 사회의 문화에 대해서도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이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특수한 지식과 담론, 이데올로기와 취향을 유포하기 위한 의미간섭의 노력은 사실 사회 안의 다양한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 시청자들도 특정 프로그램의 의미화 실천을 방해하거나 자신이 뜻하는 의미화 실천을 편성하기 위해 부단하게 텔레비전 방송국에 참여코자 한다. 그러한 점에서 텔레비전은 미셸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권력행사의 장 혹은 채널이 된다. 지식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여러 세력에게 텔레비전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간섭의 표적, 감시의 대상이다.
이처럼 막대한 중요성을 지니기에 텔레비전은 일개 미디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디어는 마사지(The medium is the massage)'라는 말로 유명한 캐나다 출신의 탁월한 매체 철학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견해에 따르면, 텔레 비전은 여러 미디어 중 하나가 아니라 환경 자체이다. 텔레비전을 환경으로서 이해하지 않는 한, 그것이 지닌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앞서 우리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의 의미와 개념에 관해 크게 의식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쩌면 그 이유는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텔레비전이 미디어가 아니라 환경으로서 확실히 자리 잡았기 때문 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은 어떠한 환경일까? 맥루한에 의하면 텔레비전으로 매개되는 전자적 정보의 환경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각자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는 환경이다. 그 이전까지는 무시되던 소수자들의 얼굴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타자들의 참여도 크게 향상된다. 이 또한 양가적이다. 약자들과의 사회적 관계가 긴밀해지고 이들의 발언권과 참여도가 강화된다는 점에서는 당연하게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인간적 노출이 사생활의 침해와 진정한 대화의 부족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어린아이를 대거 출현시키는 TV 오락 프로그램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더 많은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제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오히 려 더 많이 아이들은 고통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텔레비전 환경으로 가능해진 미디어 정치, TV 선거정치에 관해서도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손쉽게 한 측면이 있지만, 대중의 탈 정치화를 부추긴 면도 간과할 수 없다. 정치를 의제가 아닌 이미지 중심의 활동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텔레비전은 전쟁의 취재 보도를 통해 원거리에서 벌어지는 참상, 타자의 고통을 안방으로 끌어들여 연민을 유발하고, 여론을 환기시킨다. 반면에, 고통받는 타자들의 이미지 소비를 통해 비참함에 대한 대중들의 감각을 무디게 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끝으로, 텔레비전의 성격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구분한 이 세 가지 내용 외에 다른 특징에 초점을 맞춰 정리해 볼 수도 있다. 가령 텔레비전의 고유한 특징을 다른 매체나 환경과는 다르게 흐름(flow 혹은 stream)으로 파악해 보는 입장이다. 영국의 문화연구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와 같은 학자가 보기에 텔레비전은 바로 이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매체와 차별화된다. 요컨대, 그가 보기에 텔레비전은 흐름으로 존재한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텔레비전을 책이나 영화처럼 보지 않는다. 즉, 선형(linier)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텍스트를 읽거나 동영상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쑥 끼어들어 여러 개 채널을 돌려가며 이리저리 흐름을 타면서 본다. 텔레비전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이미 다수의 흐름으로 진행 중이다. 우리는 중간에 프로그램을 자르고 들어가 보다가 지루하거나 더 재미난 게 있으면 리모트 컨트롤 등을 이용해 간단하게 재빨리 다른 채널로 옮겨 탄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은 영화와 같이 집중적이지 못한 매우 분산적인 매체가 된다.
다매체, 다채널의 시대가 되면서 파도타기에 비유할 수 있는 TV 흐름 타기 현상은 더욱 도드라지고 가속화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텔레비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설명방식은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제작코자 하는 사람들에게 텔레비전 환경에 대한 보다 정밀한 이해가 기본적이고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텔레비전 환경을 모른다면 프로그램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 텔레비전은 결코 고립된 산물이 아니다. 문제는 현재의 이해조차 앞으로 다가올 텔레비전의 현실을 제대로 좇는 데 부족한 것 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