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텔레비전 기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제도적 장치로서의 텔레비전
앞서 브레히트를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장치(apparatus)라는 단어도 함께 말하였다. 브레히트가 당시의 라디오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텔레비전에 대해서도 똑같이 쓸 수 있는 용어이다. 텔레비전도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일방향적 전달, 즉 선전의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쌍방향적인 교통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 다. 독백(monolog)의 장치도 대화(dialoguc)의 장치도 될 수 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렇다. 지상파 TV는 물론이고, IPTV와 같은 새로운 하이브리드 TV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장치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장치로서의 텔레비전이란 무슨 뜻인가? 사전적인 의미에서 장치란 우선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기능하도록 특정한 장소에 마련된 기계나 도구 혹은 설비를 가리킨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장치가 무수하게 많다. 모든 기계적이고 도구적이며 기능적인 설비가 장치에 해당하며, 우리의 일상생활과 생활공간이 사실상 온갖 기계 장치로 꾸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텔레비전은 정확하게 그러한 점에서 장치이다. 시청각 콘텐츠를 송수신하는 전자적 기술 장치이며, 안방이나 거실에 오락과 위안, 정보 제공 등을 목적으로 설비된 가구 장치이기도 하다. 가정에서 텔레비전이 가족 간 대화를 끊고 가족의 소외를 유발하는 단절의 장치라는 비판은 '바보상자'라는 오명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실제로 여러 집에서 텔레비전을 없애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가족해체 현상은 텔레비전과 무관하게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촉발된 것이라는 반론과 오히려 텔레비전이 독거노인을 비롯한 소외가정에게 위안과 대화, 관계의 장치가 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일차적인 의미에서의 장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텔레비전은 어떤 일을 원만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설정된 조직, 구조, 규칙 따위로서의 장치로도 간주될 수 있다. 이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실제로 현대사회는 무수한 장치들로 구성된다. 제도적인 장치 외에도 '법적인 장치', '윤리적인 장치', '이론적인 장치', '개념적인 장치'와 같은 표현들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텔레비전 전의 중요한 정치적 성격도 바로 여기에 있다. 텔레비전은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로서 여러 가지 기능과 역할을 떠맡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프랑스의 유명한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견해에 따르면, 텔레비전과 방송은 대중매체의 일부로서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 (ISA: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 해당한다. 자본주의를 토대로 하고 체제의 재생산을 핵심 기능이자 일차적 역할로 삼는 국가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고, 궁극적으로 체제에 순응하고 체제가 원하는 '국민' 주체를 호명해 내는 장치이다. 놈 촘스키(Noam Chomsky)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표현을 빌리면 대중의 합의를 제조하고 아래로부터 지지를 끌어냄으로써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선전 장치, 헤게모니 장치이다.
이런 시각은 현실 자본주의의 텔레비전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방송을 지나치게 도구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상당한 한계를 갖는다. 텔레 비전을 국가권력의 한 수단으로 단정해 버리는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다. 장치는 비록 그것이 역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마련된 제도적 장치일지라도 반드시 권력의 입맛에 맞춰 미리 그 성격과 기능이 정해지지 않는다. 제도적 장치는 그 자 체가 만들어진 기성품이지만 또 다른 뭔가를 조제하는 데 쓰이는 도구물이기도 하다. 텔레비전이라는 장치 또한 그 쓰임새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권력은 물론이고 대중이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브레히트의 말대로 이용과 활용이 문제인 것이다.